드디어 올 여름 개봉한 네 편의 한국 텐트폴 영화들을 모두 다 보았습니다. <외계+인 1부>, <한산 : 용의 출현>, <비상선언> 그리고 <헌트>까지. 실은 첫 문장에 ‘마침내 다 보았다’고 쓰고 싶었는데 요즘 저는 마침내라는 단어를 쓰지 못하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헤어질 결심>을 패러디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단 저는 그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에 <헤어질 결심>에 빠져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싫지만, 더 싫은 것은 재미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돈 없고 가오 없고 싸가지 없고 영화 잘 못 보고 글도 잘 못 쓰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참아도, 재미가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못 참겠습니다.
[NO.24]
그런 친구 아녜요. 좋은 점도 있어요
2022년 8월 13일
노파심에 첨언하자면.. <헤어질 결심>의 대사들을 응용하는 것 자체가 재미없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 의외의 대사들이 활용되는 것을 보면서 이걸 이렇게 쓴다고? 하면서 감탄을 하곤 합니다. 다만 그중에 가장 쉬운 ‘마침내’를 이용하는 것만큼은 제 기준에서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과 별개로 <헤어질 결심>의 다양한 대사들이 변형되어 장난감처럼 재밌게 놀려지고 있다는 건, 그 영화 입장에서는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련하여 앞서 언급한 네 편의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진 아쉬운 점 하나는, 각 영화에 <헤어질 결심>처럼 말의 맛이 사는 대사가 기억에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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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측면에서 가장 아쉬운 영화는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입니다. 무엇보다 한재림 감독은 그동안의 자신의 영화에서 늘 오래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대사를 남겨 왔었던 감독이라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많은 코미디언들이 한재림 감독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의 모습을 성대모사하기도 했었는데요. 그 원인 역시 그 장면이 일단 재밌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관상>의 수양대군을 연기한 이정재의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더 킹>의 대장 검사를 연기한 정우성의 “역사적으로 흘러가듯 가”, 그리고 데뷔작이었던 <연애의 목적>에서 박해일의 “5초만 넣..“ 등등, <우아한 세계>의 헐렁한 조폭 인구(송강호)를 비롯하여 개성 있는 캐릭터의 찰진 대사를 보는 재미를 선사했던 한재림 감독의 장점이 <비상선언>에는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비상선언>이 재미가 아예 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비상선언>은 분명 재밌습니다. 솔직히 말해 재미가 없을 수 없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탑승한 하와이행 비행기 안에서 사이코패스 테러리스트가 화학 테러를 일으켜 조종사가 정신을 잃고, 그 여파로 비행기가 360도 회전을 하며 추락을 하는 영화입니다. 그 비행기 안에 탄 사람 중 한 명을 이병헌이 연기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을 송강호와 전도연이 연기합니다. 후반부가 많이 아쉬울 순 있어도 이미 어느 정도의 재미가 충족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솔직히 후반부도 썩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다만 대작 상업 영화, 그리고 재난 영화 장르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어떤 감동 포인트를 마지막에 보상처럼 제공하는 영화는 아니기에, 그래서 조금 찝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영화를 보는 내내 세월호와 다른 비행기 테러 사건들, 그리고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 사태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요. 그 상황들에서 우리 공동체가 저질렀던 실수들과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죄책감이 느껴져 누군가는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훈계한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구요. 아직 그 문제들과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볼만한 충분한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후반부 나오는 ‘페이스 타임’ 장면은 지나치게 신파적이라는 이유와 더불어 여러모로 보기 불편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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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도 이번 여름의 네 편의 영화 중 <비상선언>을 제외한 나머지 세 편은 모두 과거를 다룬 영화입니다. 아예 가상의 세계를 그린 <외계인>을 빼면 <한산>과 <헌트>는 실제 있었던 사건에 허구적 상상을 가미한 이야기인데요. <한산>은 충분한 시간이 흐른 과거, <헌트>는 <한산>보다는 충분하진 않지만 <비상선언>보다는 꽤 충분한 세월이 흐른 과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시간이 빚어낸 영화와 현실 간의 거리에 따라서 영화를 편히 즐길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되겠죠.
반대로 말하면 그 거리가 멀수록, 창작자 입장에선 편할 것입니다. 머나먼 과거의 일일수록 허구에 가까운 일로 느껴지기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 이상(어떤 감독은 역사의 결과를 바꿔버리기도 합니다) 관객이 큰 불편함을 호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감독이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할 찬스가 많아질 것이기도 하구요.
그런 측면에서 <한산>이 아쉬웠던 것은 김한민 감독이 여기에 특별한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한산도대첩’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이순신’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 재해석을 자제하고, 최대한 널리 알려진 사실과 가깝게 재현만 하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전문용어로 ‘안전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바다 위에 학 날개 모양의 성을 쌓은 채 들어오는 상대방을 기다리는 전략 역시 다소 안전지향적 선택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김한민 감독 역시 그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받들기 위해 안전한 선택을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선택이 결과적으로는 나쁘게 작용하지는 않은 것 같기는 합니다. 특히 후반부의 해전이 기가 막히게 연출됐기 때문에, 말하자면 마지막에 서빙될 메인 요리가 훌륭하기 때문에 굳이 전채 요리에 리스크 있는 상상을 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판단을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전략적 포기, 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제 입장에선 포기한 부분이 너무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냥 영화 러닝타임으로만 따져 봐도 해상 전투가 너무 늦게 나오거든요. 그래서 제가 맛있다고 느낀 이 메인 요리가 정말로 맛있는 게 아니라, 너무 늦게 나왔기 때문에, 배가 너무 고픈 상태에서 먹었기 때문에 맛있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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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박해일 배우는 이 글에서 <한산>과 <헤어질 결심>뿐만 아니라 <연애의 목적>까지 무려 세 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이기도 하네요. 재밌는 것은 <헌트>의 두 주연인 이정재와 정우성이 모두 앞서 적은 한재림 감독의 전작에 출연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정재 배우는 심지어 이번 영화 <헌트>의 감독까지 맡게 되었죠.
많은 분들이 <헌트>를 가장 궁금해하시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 유명한 이정재 배우가 감독을 맡았다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결과는 꽤 성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첩보 액션 드라마 장르 영화로써 지켜야 할 점을 잘 지켰고, 시나리오도 꽤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그 시나리오를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감독이 선택한 장르가 잘 어우러졌다는 것이 장점으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이게 새로운 시도는 아니지만 첫 연출 작품에서 이 정도의 완성도를 이끌어낸 건 인정할 만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규모가 작은 영화도 아니고, 여름 대작 라인업에 이름을 나란히 할 정도의 스케일을 가진 영화를 완성시켰다는 점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앞서 말한 <한산>과 달리 ‘안전빵’하지도 않습니다. <헌트>는 확실한 비판의 대상을 염두하고 만들어진 영화이며, 그리고 그 비판을 받는 당사자들과, 그들을 여전히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버젓이 살아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정재 감독의 <헌트>는 영화를 통해 그들을 사냥하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영화의 주인공은 자신의 사냥을 성공시키기 위해 북한 사람들과 손을 잡기도 합니다. 첫 연출작에서, 220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에서 이러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용기를 제외해놓고 보더라도 <헌트>는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군부 정권의 끝물에서 충성 경쟁을 하는 두 인물의 몸부림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 두 인물을 이정재와 정우성이 연기한다니. 참고로 <헌트>에는 둘 외에도 수많은 유명 배우들이 출연합니다. 다른 영화에서 분명 핵심적인 조연을 맡을 법한 배우들이 아무런 따옴표나 마침표 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게 누구인지 적지 않으려는 이유는, 그걸 모른 채 보셔야 더 재미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방금 잠깐 이정재 옆에 스쳐 지나간 캐릭터 김혜수 맞나? 내가 본 게 맞나?’하는 생각을 여러 번 하시게 될 것입니다. 물론 김혜수 배우가 진짜 나오는 것은 아니구요. 아무튼 감독이 이렇게 유명한 배우들을 소모품처럼 활용할 수 있는 이유 역시 배우 출신 감독이라는 점이 작용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감독이 그랬다면 “역시 감독은 배우 입장을 잘 모르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배우 출신인 감독의 선택이라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까요. 배우 출신 감독이 가진 하나의 장점이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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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1부>는 제가 네 편의 영화 중 가장 재밌게 본 영화이지만, 앞서 말한 유명한 배우들을 멀티캐스팅하는 영화의 문제점이 가장 도드라지게 드러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또한 재밌게 느껴졌는데, 솔직히 한 영화에 매력적인 인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재밌는 게 맞기는 하잖아요. 그리고 아직 1부이니까요. 물론 영화에 1부 2부가 어딨냐, 영화 한 편 만들었으면 그 안에서 적당히 완결 지어야지라는 말도 일리가 있다고는 보지만, 저는 그렇지 않는 영화가 새로운 형태의 영화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가능성을 짓밟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건 다 변명이자 핑계입니다. 여기서 솔직 고백하겠습니다. 그냥 저는 <외계인>의 세계 자체가 재밌었습니다. 이 세계에선 무슨 일이 벌어져도 벌어질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재밌는 세계가 2부에도 끝나지 않고 3부를 예고했으면 좋겠고, 3부에서도 끝나지 않고 또 다음 챕터가 있다고 말해도 계속해서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게 될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외계인들의 뻔뻔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영화의 외계인들은 지구인들에게 굳이 자신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실 외계에 어떤 생물체가 살고 있는 곳이 있고, 난 그곳에서 왔고, 그중 지구에 온 이유는.. 음.. 멀리서 볼 때 지구가 아름다웠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특별해서? 특히 한국 사람들 친절하고 한국 음식 치킨 떡볶이 기가 막혀서 서울에 살고 있는 거야", 같은 말들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볼 땐 네가 외계인이지”라는 말을 해버립니다. 그냥 그렇게 된 거야. 설명할 수 없어. 그게 외계고 그게 인생이야, 라고 세상 전체가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게 어쩔 수 없이 내가 살고 있는 인생이니까, 그 상황이 내게 주어졌을 때 내가 어떻게 리액션하면 될지에만 집중하면 되는 세계. 그 생각을 하며 각 캐릭터들의 리액션을 구경하다 보니, 142분이라는 러닝타임이 훌쩍 지나가버렸던 것 같습니다.
상업 오락 영화를 관람하면서 재미있는 이유와 별로인 이유를 지나치게 구분하는 일이 정말 꼭 필요한 일인가 고민이 될 때가 많습니다. 아니 저는 솔직히 평소에는 그럴 필요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오락 영화? 그냥 재밌었으면 재밌었다! 하면 되는 거고, 재미없으면 에이 재미없어 끝,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번 메일에 이러한 내용을 길게 적은 까닭은 영화 <외계+인>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헌트>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비상선언>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한산>..은 조금 좋아합니다. 좋았기 때문에 아껴주고 싶었습니다. 지나치게 비판받는 영화들에, “사실 이 친구 그런 친구 아니에요. 좋은 점도 있어요!” 라는 말을 얹으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네 편의 영화의 공통점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아쉬운 점도 물론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손절할 수는 없는 친구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끔 영화에 대해 사랑을 고백하시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 나도 사랑해야 되는 거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요. 지금의 저에게 영화는 사랑이라기보다는 그냥 친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점까지 사랑할 순 없지만, 장점만큼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 친구야, 내가 볼 땐 넌 외계인 같지만 그래도 좋아한단다.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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