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일어난 일들로 인해 상상도 못했던 경험을 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지나친 영화관에 지금 막 시작하는 영화가 있어서, 우연히 집에 가는 길이 같아서, 하루 종일 내리던 비가 우연히 그때 그쳐서, 찍고 있던 카메라 화면에 우연히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와서, 우연히 밀린 휴가가 누군가와 겹쳐서, 우연히 갔었던 여행지가 그 사람의 최애 여행지라서, 내가 관심 갖고 있던 영화가, 브랜드가 우연히 그 사람이 마침 한참 찾고 있던 거라서. 그리고 등등등. 우연히 저를 알게 되어 원데이 원무비까지 읽고 계신 여러분께, 이번 주 얘기해 드리고 싶은 ㄴ상상도 못한 정체ㄱ의 영화는 바로 <우연과 상상>입니다.
[NO.23]
다시 한번, 이라는 희망
2022년 8월 6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먼저 우연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1.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
2. 어떤 사물이 인과율에 근거하지 아니하는 성질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사전 편찬하신 박사님 나름 훌륭하다, 나쁘지 않게 잘 정의하신 것 같다고 (건방진) 칭찬 드릴 수 있겠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데요. 저라면 저기에 하나의 표현을 더할 것 같습니다. ‘절대 다시 한번 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우연은 선생님들이 정의하신 것처럼 ‘어떤 인과율에도 근거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절대 동일하게 반복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카피해서 똑같이 재현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의도’나 ‘인과 관계’가 들어간 순간, 그 결과는 겉으로는 같아 보일진 몰라도 본질적으로는 같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그 일이 주는 감흥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연이 주는 어떤 특별한 감흥은, 내가 ‘아무런 의도 없이’ 했다는 것에 기반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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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상상>은 제목 그대로 우연과 상상에 관한 영화입니다. 2021-22년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한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연과 상상>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드라이브 마이 카>는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그 성과에 대해 눈에 보이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카데미에서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소감 영상을 보신 분 계시나요? 차오르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수상 소감을 발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상상’도 못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확실한 건 그가 이뤄낸 모든 것들이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일 겁니다. 물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카메라를 통해 포착하려는 것이 배우와 세상이 우연히 만들어낸 무엇, 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 우연을 정말로 우연히 획득한 것은 아니겠죠.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가 전 세계 영화 팬들의 인정을 받은 이유는 다양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중 ‘예술로서의 영화’라는 관점에서 팬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매력이 하나 있다면, 그건 그의 영화에 하마구치가 지향하는 ‘영화 만들기 방법론’이 뼈대를 드러낸 채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마구치 류스케는 자신의 영화에서 자주 자신의 영화 연출론을 장면화합니다. 그 자체로 다섯 시간짜리 워크숍 같은 영화 <해피 아워>엔 무게 중심 잡기 워크숍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드라이브 마이 카>에선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현장과 동일한 방법으로 대본 리딩 연습을 하는 극단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두 영화 모두 제가 정말 정말 좋아하는 영화라 언제 한 번 많은 사람들과 꼭 같이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한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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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우연과 상상>은 보다 노골적으로 ‘영화 만들기’를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무엇보다 영화의 제목을 이루고 있는 두 단어 ‘우연’과 ‘상상’은, 누군가에겐 영화와 동의어로 느껴질 정도로 1차원적인 비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차원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우연과 상상>과 <드라이브 마이 카>를 비슷한 시기에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연과 상상>이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영화를 만들기 위한 예행연습 같다는 것을 느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반대로 <드라이브 마이 카>를 <우연과 상상>을 만들었던 과정을 복습하는 영화로도 생각하실 수도 있겠구요. 그래서 예습/복습 같은, 보다 편한 마음으로 뭔가를 시도 혹은 시험해 보는 과정인 <우연과 상상>에, 하마구치 류스케의 연출론이 드러나고 제목도 일차원적으로 지어진 것 또한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연과 상상>은 하마구치 류스케가 어떻게 세상이란 우물에서 우연을 길어올리는지, 그 방법을 목격할 수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 편의 단편 모두 정말 재밌지만, 그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편은 세 번째 작품 <다시 한번>입니다. ‘코로나’만큼 이상한 이름을 가진 통신 바이러스가 지구를 휩쓴 세상이 영화의 배경입니다.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데이터베이스가 삭제된 세상, 우리나라로 예를 들면 주민등록번호랑 이름 같은 것들이 다 초기화됐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류스케 감독은 그런 이상한 바이러스를 만든 뒤, 더 이상한 우연을 만들어 놓습니다.
나츠코(우라베 후사코)와 아야(카와이 아오바)는 우연히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리던 중 ‘실수’로 서로를 아는 척하게 됩니다. 나츠코는 고등학교 시절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지만 마음을 온전히 고백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갖고 있는 인물인데요. 그렇게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동창회를 위해 찾아간 고향 도시에서 아야를 그 친구로 착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장면이 영화에 정말 재밌게 묘사됩니다. 에스컬레이터를 둘러싼 두 인물의 동선을 글로 설명하기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은데요. 그래도 한 번 도전해 보겠습니다.
자, 내가 에스컬레이터를 올라가고 있습니다. 근데 무심코 본 반대편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왠지 아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에스컬레이터는 자동으로 움직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와 그 사람은 계속해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다 2층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 사람이 누군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는 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미 1층에 내려가 버렸으니 조금 늦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빨리 다시 내려간다면 그 사람을 멈춰 세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탑니다. 에스컬레이터에선 가만히 서 있으라고 배웠지만 뛰어 내려갑니다. 그런데 그때 밑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것이 보입니다. 앗 자세히 보니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과 내가 점점 가까워집니다. 내가 눈으로 말합니다. “너.. 맞지?” 그 사람이 눈으로 맞다고 답하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 기다려.” “내가 밑으로 갈까?” “위에 있어.” “알았어.”
우연히 내가 좋아했던 사람과 닮은 사람을 마주칠 확률, 근데 그 사람이 진짜 그 사람일 확률, 근데 그 사람도 나를 알아볼 확률, 근데 알아볼 뿐만 아니라 다시 왔던 에스컬레이터를 되돌아올 확률, 이 확률도 정말 어마어마하게 희박한 것이지만, 그것보다 정말 더 희박한 것은 그것이 둘 모두의 착각이었다는 확률일 것입니다. 그 희박한 일이 에스컬레이터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정말 오묘하게 느껴졌는데요. 왜냐면 에스컬레이터는 반대편에 언제든지 아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비일상적인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가장 일상적인 공간이었다는 것을, 이 장면을 보고 새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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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뒤는 약간 스포일러긴 한데 그냥 계속해보겠습니다. 이 이상한 상황에서 자신이 ‘아는 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깨달은 것은 아야입니다. 아야는 나츠코에게 자신이 네가 찾던 ‘미카’가 아니라 아야라는 것을 밝힌 뒤 미안해합니다. 처음 보는 사이이므로, 서로 착각한 것이므로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진심으로 미안해합니다. 이 미안함이 진심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아야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낙담한 나츠코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신이 ‘미카인 척’을 할 테니, 그동안 마음에 담아둔 말들을 하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게 정말로 희박한 확률이 하나 더 얹어지게 됩니다.
희박한 확률의 연속, 그리고 우연들과 상상들이 만들어낸 잠깐의 연기를 마친 둘은 다시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모든 우연이 시작된 장소, 에스컬레이터로 향합니다. 이제 모든 연기가 끝났기에, 둘 사이의 더 이상의 우연은 없을 것이기에, 그 길에서 둘은 비로소 척이 아닌 진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아야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비롯한 진짜 아야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츠코는 아야에게 자신과 착각했던 진짜 그 아이에 대해 묻습니다. 아야는 그 아이가 피아노를 즐기는 아이였으며, 함께 피아노를 치며 점심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고, 그 시간이 특별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때 그 말을 들은 나츠코가 갑자기 아까 했던 것을 “다시 한번” 하자는 제안을 하고, 그렇게 둘은 그 이상한 에스컬레이터에서 평소라면 절대 안 그럴법한 이상한 오르내림을 다시 한번 재현합니다.
이를 발견한 하마구치 류스케가 카메라를 줌인하자, 영화는 ‘그 아이인 척’하는 나츠코와, 나츠코가 ‘그 아이인 척’하는 것을 ‘모르는 척’하는 아야의 영화 속 영화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 순간 둘은 미리 협의된 것을 넘어선 마법 같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저는 이 순간이 정말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 그 자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전 대화를 통해 인물의 디테일을 파악한 뒤, 이를 영화에 녹여내 상상을 넘어선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은 아무리 다시 한 번 해봐도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늘 이 방법을 통해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것은 앞서 말했듯 세간에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이 예상치 못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이때 또 하나의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대체 이 영화는, 아니 영화 속 영화의 연기의 끝은 어떻게 마무리될지, 각자 가던 길을 멈추고 갑자기 뒤를 돌아 이 영화의 컷!을 외칠 사람이 아야일지 나츠코일지, 그것도 아니면 하마구치 류스케일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며 영화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아야가 또다시 한번 에스컬레이터를 뛰어오릅니다. 그대로 나츠코에게 뛰어간 아야는 나츠코를 붙잡고 지금까지 기억해 내지 못했던, 점심시간에 함께 피아노를 쳤었던 그 아이의 이름을 외치고야 맙니다. 이때 아야가 떠올린 그 이름은 진짜일까요, 아니면 상상일까요.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아야가 그 이름을 우연히 떠올린 것이, 정말로 우연히 벌어진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늘 우연 같은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며 에스컬레이터 같은 길을 걷습니다. 내가 스스로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은 착각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가만히 서 있고 우연이 우연히 저를 지나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연은 내가 의도적으로 만나려고 하는 순간 만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런 우연은 절대로 다시 한 번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어떤 영화는 그것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만듭니다. <우연과 상상>이 정말 좋았던 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그 희망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우연을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희망. 우연이 주는 기쁨을 더 누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희망. 비록 헛된 희망일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그 희망을 저는 못 참겠습니다.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우연과 상상>은 현재 왓챠 및 네이버 시리즈온을 통해 관람 가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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