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되고 의미 없는 일 없냐?” 영화 <오마주>의 주인공인 영화감독 지완의 대사입니다. 이는 페이가 그렇게 세지는 않지만 의미는 있는 아르바이트의 제안을 받고 난 지완의 반응인데요. 이 대사 한 마디는 지완의 상황을 잘 알려줍니다. 지완은 지금까지 세 편의 영화를 연출했지만 흥행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았고, 그래서 다음 영화를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전망도 밝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계속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 실질적인 위기는 그냥 현재 수중에 돈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완은 “엄마 밥 줘”라고 말하는 아들에게 쌀이 없다는 말을 해야 하고, 남편에게는 남편의 월급날마다 생활비를 입금해달라는 독촉 문자를 보내야 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엄마 밥 줘”라고 말하는 아들이 이렇게 얄밉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요. 그래서 오늘 점심은 밥을 혼자 차려 먹었습니다ㅋ
[NO.22]
꼭 판사가 돼야만 하겠어?
2022년 7월 30일
동시에 “엄마 돈 줘”를 하지 않아도 되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저 역시 돈 되고 의미 없는 일을 더 선호하기는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시키실 일 있으신 분 언제든 연락주시구요.. 아무튼 이렇게 영화 얘기를 하다가 정신없이 제 이야기를 해버릴 정도로 <오마주>가 그리는 현실은 꽤 현실적입니다. 대체 영화를 한다는 게, 꿈을 좇는다는 게 얼마나 큰 죄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마주>는 그에 대한 대가를 상당히 참혹하게 묘사합니다.
그런 지완에게 의미는 있지만 돈은 안 되는 일이 찾아옵니다. 여태 자신의 인생에 큰 의미를 차지하지만 돈은 주지 않는 영화 일을 해왔던 지완으로선, 또 비슷한 일이 나타났으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더 당연한 것은 적지만 약간의 돈이라도 벌어야 한다는 것이고, 결국 지완은 그 일을 받아들입니다.
지완이 해야 하는 일은 1962년 영화 <여판사>의 복원 작업입니다. 오래된 영화라 필름 상태가 온전치 않고, 심지어 중간 어느 부분엔 오디오가 들리지 않아 그 부분의 대사를 유추한 뒤 더빙을 해야 합니다. 영화의 감독과 배우는 죽었고, 시나리오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완이 이 일에 끌리는 이유는 <여판사>의 감독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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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등장하는 <여판사>는 영화 속뿐만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영화입니다. <여판사>의 감독 홍은원(1922~1999)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시나리오 작가이자 두 번째 여성 감독이라고 합니다. 총 세 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그 첫 작품이 바로 <여판사>입니다. 이 설정은 <오마주>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데요. 그렇게 세 편의 영화를 연출하고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지완과 홍은원 감독이 겹쳐지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의 레이어가 더 덧붙여지게 되는데, 그건 <오마주>의 감독 신수원입니다. <오마주>는 신수원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신 감독은 11년 전 홍은원 감독의 존재를 알게 된 뒤 큰 위로를 받고 이 영화를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지완의 이야기인척 했지만, 실은 자신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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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주>는 간단히 정리하면, 지완이 <여판사>의 복원을 위해 홍은원 감독의 발자취를 쫓는 과정에서 만난 한 여성 편집 기사로부터 “끝까지 살아남아”라는 말을 듣고 ‘계속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이야기,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계속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을 응원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응원의 대상엔 신 감독 자기 자신도 포함된 것이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오마주>가 신 감독의 세 번째 영화가 아닌 ‘다섯 번째 (장편)영화’로 마침내 완성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감동적입니다.
영화엔 <여판사>의 몇 장면이 일부 삽입되어 있습니다. <여판사>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여성 판사가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슈퍼 히어로 여성 판사, 시민을 구한 여성 판사, 엄청난 잘못된 판결을 내린 여성 판사도 아닌 그냥 ‘여성 판사’가 주인공인 것 자체가 상징적입니다. 그때는 여성 판사 자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될 만큼 특별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한 남자가 진숙에게 묻습니다. “진숙이, 꼭 판사가 돼야만 하겠어?” 진숙이 대답합니다. “한 번 마음먹은 일인데 포기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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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 본 또 한 편의 여성 감독이 주인공인 영화가 있습니다. <썸머 필름을 타고!>라는 영화입니다. 고등학교에서 영화 동아리를 하고 있는 학생 ‘맨발’이 주인공입니다. 맨발은 자신의 데뷔작인 사무라이 영화 <무사의 청춘>을 찍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동아리에서 이번 썸머엔 다른 학생의 영화를 찍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동아리의 모든 멤버들과 장비가 모두 그 학생의 영화 현장에 투입되기에 맨발의 데뷔작 촬영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맨발 입장에서 이건 ‘한 번 마음먹은 일인데 포기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 나름의 크루를 꾸려 촬영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겨우겨우 촬영을 진행하고 있는 맨발에게 갑자기 영화 속 한 남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어이 맨발이, 꼭 감독이 돼야만 하겠어?”라는 말 정도였다면, 맨발도 간단히 무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맨발이 듣게 되는 말은 그 누구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건 바로 미래에 영화가 없어진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영화냐고 생각하시겠지만, 반전 없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선 다 진짜입니다. “미래엔 영화가 없다”는 말은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서 온 사람의 말인데, 영화 속에선 이 타임머신/시간여행에 대해 의심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여긴 시간 여행이 가능한 시대이고, 그러므로 영화의 죽음 역시 확정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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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확정적인 죽음 앞에서 맨발은 망설이게 됩니다. 앞으로 영화가 없어진다는데 내가 왜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 지금 이 여름 이야기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텐데, 왜 내 청춘을, 왜 ‘맨발의 청춘’을 ‘무사의 청춘’을 찍는데 소비해야 하는 거지? 물론 이 이야기의 주인공 맨발은 영화의 주인공답게 끝까지 영화를 만들 것입니다. 그게 영화이고, 그래야 영화가 완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하고자 마음을 먹은 주인공이 있습니다. 세상은 그 무언가를 이뤄내려는 주인공을 방해합니다. 무언가를 이뤄내려는 열망과 방해하는 강도의 치열한 밸런스가 재밌는 이야기를 만듭니다. <썸머 필름을 타고!>의 방해는 무척 강력합니다. 영화를 만들려는 주인공에게, 그게 없어진다고 협박합니다. 돈은 안 되지만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의미는 별로 없지만 돈이라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아무런 의미 자체가 없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화가 묻습니다. 이래도 영화를 만들 건가 맨발? 이래도 감독을 해야만 하겠어 지완? 이래도 판사, 진숙? 이래도 계속, 철홍?
엄청난 꿈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영화를 소개했지만, 굳이 그렇지 않은 분들이라도 <썸머 필름을 타고!>를 보고 적지 않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자체로 충분히 재밌고 감동적인 영화입니다. 그 강력한 방해를 이겨낼 만큼 주인공의 의지가 엄청난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그 의지가 드러나는 장면이 영화의 후반부에 있습니다. 맨발은 힘들게 완성한 자신의 영화를 학교 축제의 상영회에서 많은 친구들 앞에 선보입니다. 그러나 머릿속에선 계속해서 고민이 가시지 않는 상태입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만든 영화의 결말에 아직까지 확신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사무라이 영화의 끝에 주인공이 최후의 적을 베지 않는다는 결말이 이제 막 시작되려는 시점에서, 마침내 결단을 내린 맨발은 모두가 보고 있던 영화를 컷해버립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이 컷한 영화에 들어가 직접 최후의 적을, 자신에게 영화가 없어진다고 말했던 그놈을 베어버립니다. 원데이 원무비 22호도 여기서 컷.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오마주>는 넷플릭스에, <썸머 필름을 타고!>는 현재 극장 상영 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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