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화산보다 회색 화산이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용암은 그 움직임이 느리고 예측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운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눈으로 보면서 피할 수 있어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라고 하는데요. 반면 회색 구름과 재로 이루어진 회색 화산은 반경 수십 킬로미터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갈 정도로 위력적이고 그 속도도 빨라서 훨씬 위험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중요한 정보를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관람한 다큐멘터리 <사랑의 불꽃>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희귀한 정보는 아니라, 이에 관해 이미 알고 계셨던 분들도 많이 계실 것 같은데요. 재밌는 것은 여러분이 만약 예전에 ‘빨간 화산 회색 화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셨다면, 그건 분명 60년대부터 화산을 연구해온 화산학자 부부 카티아(Katia)와 모리스(Maurice) 크라프트(Krafft)의 연구 덕분일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흰 결국 '같은 사람'으로부터 이 정보를 들은 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두 사람이 오늘 얘기할 영화 <사랑의 불꽃>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NO.33]
빨간 영화제, 회색 영화제
2022년 10월 22일
<사랑의 불꽃>은 사라 도사 감독이, 크라프트 부부가 사망 전까지 남긴 수백 시간 분량의 영상을 재조립하여 만든 영화입니다. 영화의 영어 원제는 한글 제목 그대로 ‘Fire of Love’ 인데요. 감독은 크라프트 부부가 찍은 ‘Fire’가 넘실대는 영상들에서 ‘Love’를 발견하고, 그 사랑의 서사를 활용하여 영화를 진행시킵니다. 저는 이 영화의 제목이 Fire of Love가 아닌 Love of Fire이거나, Fire and Love 또는 Fire is Love여도 꽤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요. 그만큼 사랑과 불꽃이 조화롭게 잘 어우러진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면 등장인물들 간의 사랑의 작대기가 정말 어지러울 정도로 잘 섞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일단 소개팅(영화에서는 Blind date라고 표현됩니다)으로 만나 ‘화산’이라는 특수한 공통 관심사를 통해 하나가 된 카티아와 모리스 간의 사랑이 있구요. 둘째로 이 영화의 제3의 주인공인 화산을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만큼 사랑하는 크라프트 부부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카티아는 화산을 두고 이런 말을 합니다.
“Once you see an eruption, you can’t live without it.”
'분화를 한 번이라도 보게 된다면, 당신은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둘은 계속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화산으로 향합니다. 이때 화산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자, 크라프트 부부가 극복해야만 하는 빌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삼각관계 구도 덕분에, 다소 딱딱하고 교육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한 편의 로맨스 영화로 변모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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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 영화는 그 어떤 로맨스 영화가 갖고 있는 비극보다도 훨씬 더 비극적인 뉘앙스를 품은 채 진행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건 카티아와 모리스가 1991년 일본의 운젠 화산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러니까 이 영화의 제목 식으로 표현하자면 ‘불꽃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건이 영화 바깥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더해 사라 도사 감독은 이 부부의 죽음을 영화 초반에 다시 한번 관객들에게 주지시키는 과감한 스토리텔링 전략을 구사하는데요. 영화의 나레이터는 아주 초연한 목소리로, 마치 이것이 그다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은 말투로 이렇게 말을 합니다.
“Tomorrow, will be their last day.”
“내일이, 이들의 마지막 날입니다."
주인공의 비극적인 마지막을 정해 놓은 채 시작되는 영화이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은 편입니다. 두 사람이 모든 것을 녹이는 용암을 눈앞에 두고도 항상 명랑한 태도를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용암이 바로 뒤에서 하늘 위로 솟구치고 있는 상황에서도 마치 텔레토비가 뒷동산을 산책하듯 두꺼운 방염복을 입고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은, 정말 경악스러움을 넘어서 기괴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었는데요. 또 다른 영상에서 모리스는 달구어진 암석 위에 팬을 올려놓고 계란프라이 요리를 하기도 하는데, 계란의 모양이 예쁘게 나오지 않자, 카메라를 보며 “원래 이거보다 더 잘한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저는 크라프트 부부가 촬영한 영상들이 ‘밝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그건 이 사람들의 성향 자체가 긍정적이지 않고서야, 화산을 평생 드나드는 이 무모한 행위를 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 영상은, 애초에 화산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명랑한 사람만이 찍을 수 있는 영상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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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티아와 모리스의 명랑한 연구는 어찌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빨간 화산과 회색 화산의 차이? 그런 것쯤은 그저 두 화산을 직접 가보기만 한다면, 쉽게 그 차이를 발견할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들이 대단한 것은 직접 그곳에 갔고, 화산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겨 왔다는 것입니다. 직접 그곳에 갔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과 돈과 목숨을 그 사랑을 위해 던졌다는 것이 감동적인 것입니다. 언젠가 분명 그 불꽃에 데여 자신의 몸이 다 타버릴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진짜 죽을 때까지, 아니 죽기 직전까지 화산과의 사랑을 멈추지 않았던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5박 6일의 영화제 일정의 마지막 영화를 보고 있는 저의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사랑의 정도로는 아직 이 부부의 사랑과 비교하기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비슷한 결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평소에 얼마나 영화를 사랑해왔고, 또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삶을 살았던 건지에 대해서 자신은 없습니다. 김철홍 너 영화 별로 안 사랑하잖아! 라고 하셔도, 딱히 할말은 없는데요. 그래도 분명한 건, 저라는 사람은 그때 인생에서 고를 수 있는 모든 다른 선택들 중 부산 영화제 현장에 가 있는 것을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일로 보는 것도 아닌데, 놀러 간 건지 일로 간 건지 헷갈려 하면서도 영화제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니까요. 저는 코로나 이전의 부산영화제와 코로나 이후의 부산영화제의 차이를 알고 있으니까요. 사람이 많은 휴일의 부산영화제와 평일 부산영화제의 차이를 알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부산 영화제를 가보기 전의 나와 갔다 온 나의 차이를 알고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저는 내년에도 일이 있든 없든, 부산에 갈 것 같습니다.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 이야기 THE END.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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