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나는 김철홍 평론가로서 부산에 갔다. 내가 부산영화제에서 맡은 역할은 모더레이터였다. 영화제에서 모더레이터는 영화 상영 직후 이어지는 ‘관객과의 대화(Guest Visit)’ 행사를 진행하는 사람이다. 사실 영화제에서 GV 모더레이터의 역할은 크지 않다. 영화제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영화를 만든 감독과 배우들이며, 그들만큼 필수적인 존재가 관객이니까. ‘관객과의 대화’란 쉽게 말해 바로 그 두 주인공 간의 대화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과 영화를 본 관객의 대화. 모더레이터는 그 중간에서 형식적인 멘트를 날리며 사회를 보는 사람에 불과하다. 물론 모더레이터와 게스트 간의 동등한 대화를 관객이 경청하는 방식의 GV 역시 존재하지만, 영화제에서, 특히 부산영화제에서의 GV는 확실히 성격이 다르다. 이곳은 그 누구의 것보다 자기 자신의 감상과 질문을 전하고 싶어 하는 관객들의 축제다. 그러니 모더레이터는 되도록이면 자신의 말을 줄이는 것이 좋다.
부산영화제의 모더레이터는 내 개인적 욕심을 채우기엔 부적합할지 모르지만, 하지만 그래서 더욱 영광인 자리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 그런 적극적인 관객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소이기에, 그런 자리에서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정말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3일 동안 다섯 개의 GV를 진행했다. 영화제에서만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영화 두 편과 이미 개봉한 영화 한 편, 그리고 OTT를 통해 볼 수 있는 시리즈 두 편이었다. 솔직히 다섯 편 모두, 내가 직접 볼 영화를 골랐다면 후보에 오르지 않았을 영화이기는 했다. 그래서 처음 나에게 주어진 시간표를 받았을 땐, 성에 차지 않는 성적표를 받은 것처럼 아쉬운 마음이 들기는 했었다. 다섯 작품을 만든 사람들한텐 미안하지만, 냉정히 말해 이 작품과 아직 보여준 게 많이 없는 영화 평론가인 나의 매칭이 기분 나쁘지만 썩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모인 파티에, 인기가 없어 홀로 남은 사람들끼리 짝이 지어진 느낌이었다.
물론 GV를 하는 순간은 정말 좋았다. 객석은 항상 매진이었고, 관객들의 질문 참여도 매번 감동스러울 만큼 적극적이었다. 무엇보다 짜릿했던 것은 이 거대한 행사가 내 말 한마디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마이크를 잡고 숨을 고른 뒤 내가 시작하고 싶을 때 이 모든 것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관객과 게스트의 문답이 한차례 끝날 때마다 그 내용을 나의 언어로 다시 정리해서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모더레이터이기 이전에 나 또한 한 명의 부산영화제의 적극적인 관객 중 한 명이었으므로, 말 그대로 성공한 관객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GV를 하는 동안은 정말 일말의 아쉬움도 없었다.
마지막 GV가 끝나고 난 후. 나에게 주어진 일을 마친 나는 관객의 자리로 돌아가 아직 진행 중인 축제를 즐겼다. 그러자 잠시 밀려나 있었던 아쉬움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내가 선택한 영화의 상영이 끝나자, 나보다 경력이 많은 한 모더레이터가 무대에 나와 GV를 진행했는 것이었다. 철홍이 내게 말을 걸었다. 너도 할 수 있잖아. 너가 저 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너가 안 하고 저 사람이 저기에 있는 거야? 철홍 또 영화만 보다가 집에 갈 거야? 내년에도 이럴 거야? 나는 왜 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왜 아직도 아쉬운 걸까. 내가 그토록 원하던 부산에 일로 왔는데. 나는 언제 제대로 만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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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1일. 올해 부산 영화제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마침내 새벽>이라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로마 출생인 사베리오 코스탄초 감독의 영화로, 올해 열린 베니스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유명 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초청된 영화라는 사실은, 늘 내가 볼 영화를 선택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야기는 1950년 대 로마에서 진행된다. 어린 소녀 미모사가 언니를 따라 영화 촬영장에 갔다가, 우연히 캐스팅되어 스타 배우들과 함께 상류 사교 사회를 돌아다니며 꿈결 같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미모사는 계속해서 원치 않는 일에 휘말린다. 자신이 선망하던 배우와 시간을 보내는 건 정말 황홀한 일은 맞지만, 아무래도 이 뜻밖의 상황이 썩 편하지는 않다. 일단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이 신경 쓰이는데, 이 가족은 자신에게 원하지 않는 상대와의 결혼을 요구하기도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심지어 스타 배우는, 미모사를 상류 사회의 멤버들에게 미모사가 아닌 다른 존재로 소개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미모사를 북유럽에서 온 시인 샐리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어쩐지 미모사의 처지가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이 상황 자체는 신나는 게 맞는데, 약간의 원치 않는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 신경이 쓰이는 상태.
그리고 영화는 그렇게 마침내 새벽을 맞이하며 끝이 난다. 다른 영화처럼 뻔하게 미모사에게 결정적인 깨달음의 순간을 주지 않는다. 새벽이 오자 미모사는 영화 내내 은근히 자신의 편을 들어줬던 중년의 남자 루퍼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고마웠어요. 루퍼스가 답한다. 제가 뭘 했다구요. 그러자 미모사가 이렇게 말한다. 그냥 모든 게 다요. 나는 이 단순한 대사 한 마디에서 미모사가 성장했음을 느꼈다.
나는 성장했을까. 부산에 절대 일로 갈 거야라는 목표를 마침내 이룬 것만으로, 과연 이걸 성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나 또한 미모사처럼 아주 잠깐 선망하던 곳을 스쳐 지나갔을 뿐이고, 그 후의 내 일상도 예전과 같을 것이다. 나는 내년에도 부산에 일로 올 수 있을까. 아니 나의 내일은 어떻게 될까. 2023년 10월, 부산에서 영화와 같은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ktx 안에서 철홍이 말했다. 고마웠어요. 부산이 답한다. 제가 뭘 했다구요. 나는 말했다. 그냥 모든 게 다요. 모든 게 다 고마웠다. 부산. - 끝 -
Special thanks to : 젊은 비평가 대담을 마련해준 씨네21.
프로그램팀 김지혜 실장님.
씨네21 송경원 기자님.
정한석 프로그래머.
심현지.
엄마.
나.
그리고 소중한 답장과 후기를 남겨주시는 구독자 여러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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