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이틀 뒤인 8월 3일, 나는 그 이틀 동안을 고민 고민하다가 메일 한 통을 보냈다. 수신자는 부산영화제 공식 메일이었고,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제안] 영화평론가 김철홍이라고 합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나는 무턱대고 보낸 이 메일 한 통 덕분에 올해 부산영화제에 일로 갈 수 있었다.
메일에 적은 내용은 별게 없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소개를 한 뒤, 나를 써달라는 제안을 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동안 내가 영화평론가라는 직함을 달고 활동했던 이력들, 무엇보다 영화제와 관련한 몇 가지 일을 했던 경험들에 대해 적었다. 이것이 섭외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제안서에 아무 관련 없는 영화의 비평 글 링크를 첨부하는 것보다는 영화제와 관련한 글들을 밑반찬으로 깔아두는 것이 조금이라도 성의 있어 보일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씨네21을 통해 부산 영화제 공식 데일리 지면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관련한 이야기는 작년 원데이원무비 31~33호에 적은 바 있다.)
물론 메인디쉬는 제안의 메시지였다. 다짜고짜 ‘저에게 아무 일이나 주세요’라고 적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어떤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하기도 애매했는데, 그건 부산영화제의 누가 어떤 선정 과정을 거쳐 사람을 섭외하는 것인지에 대해 전혀 알고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렇게 메일을 보내는 게 맞는 건지, 아니 그것보다 우선 이 공식 메일 주소가 실제로 유효한 주소이기는 한 건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의문이 들었다.
앞서 말한 이틀간의 고민 중 대부분은 이와 관련한 것이었고, 그 고민의 끝은 결국 의심이었다. 보내는 게 맞을까. 보내도 될까. 그런데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 누구에게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볼 수 없었고, 아니 사실 물어볼 사람이 있다 해도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사적으로 친하진 않지만 연이 있는 씨네21 기자분께 부탁해 유관 담당자의 개인 메일 주소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겠지만 그건 싫었다. 뭔가 부탁하는 것만으로도 약간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이었고, 그랬다가 혹시 거절당하기라도 하면 더 부끄러울 것 같았다.
그래서 결론은 그냥 보내자-였다. 괜히 모르는 거 아는 척하지 않고, 솔직하게 모든 것을 적기로 했다. 어차피 안 될 거라면 최대한 후회가 남지 않게. 또는 메일을 받아볼 누군가에게 좋은 인상이라도 남기자 하는 마음으로. 그래서 메일에 먼저 '섭외 과정을 잘 알지 못해 이렇게 불쑥 메일을 보낸 것을 이해해달라’는 말을 적은 다음,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적기 시작했다. 나에게 일을 맡겨달라. 영화제에 누를 끼치지 않을 자신이 있다. 부산영화제에서 일을 하는 것을 오랫동안 꿈꿔 왔다. 특히 영화제에서 일을 하는 다른 평론가들을 객석에서 바라보며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메일까지 보내게 됐다.. 그렇게 나는 편지에 아주 오래전부터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걸 몇 번을 다시 읽고 다듬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만큼은 짧았다.
답장이 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용 역시 짧았다는 것이다. 답장은 영화제의 OO팀의 한 실장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메일엔 나의 관심에 감사하다는 인사와 나의 제안 내용을 담당자에게 전달하겠다는 내용만이 적혀 있었다. 메일이 어쨌든 누군가에게 읽히긴 한 것이 정말 기뻤지만,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부터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었다. 흡사 무인도에서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는 구조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인간은 필요하다면 그 어떤 작은 단서에서도 희망을 찾아내는 동물이 아니었던가. 나는 내 메일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답장의 마지막 문구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좋은 기회로 뵐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신경 끄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태의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날이었다. 하루는 엄마가 대뜸 유퀴즈를 봤냐고 물었다. 그즈음 유퀴즈에는 <더 글로리>의 박연진 역으로 스타덤에 오른 임지연 배우가 출연했었고, 그 자리에서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첫 소속사와 계약을 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썰을 풀었었다. 그 모습을 본 엄마는 임 배우가 적극적으로 소속사를 직접 찾아갔고, 그 당돌함 덕분에 대표의 눈에 들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라며, 나에게도 이와 같은 태도로 뭔가를 좀 해보라는 식의 말을 건넸다. 영화제 측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절묘한 타이밍에 들어온 엄마의 일상적인 잔소리에 나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아무 결과 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말만 할 수 있는 나이는 진작 지났으므로.
인터넷에 임지연 배우의 나이를 검색해 보니 나와 같은 90년생이었다. 그녀가 소속사를 찾아갔던 때의 나이는 몇 살이었을까. 아니 나는 몇 살 때 유재석의 질문을 받을 수 있을까. 영상 속에서 유재석이 임지연에게 물었다. "거절당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같은 건 없으셨어요?" 임지연이 답했다. "거절당하면 그냥 거절당하지 뭐.. 무서울 게 없는 나이여서요." 거절이 무서운 나이인 나는 너무나 임지연이 부러웠다. 성공해서 유재석의 질문을 받았다는 것보다 더 부러운 것은, 무서울 것이 없는 나이에 과감하게 도전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후회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아니 그냥 어느 날이 아니라 내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어느 날. 8월 18일 금요일.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기한 것은 분명 모르는 번호였지만 어디서 온 전화인지 알 것만 같았다는 것이고, 전화를 받자마자 내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내게 건넨 첫마디가 "김철홍 평론가"가 맞냐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유재석의 질문이 하나도 부럽지 않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