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민 안 가면 안 돼?” 2013년에 개봉한 영화 <잉투기>의 주인공인 태식이 엄마에게 하는 말입니다. 엄마는 한국이 상위 1%만이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하며 코스타리카로의 이민을 준비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에 미련이 없던 태식은, 원래는 엄마의 제안을 아무 저항 없이 따르려던 참이었는데요. 영화에서 모종의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태식의 마음이 바뀌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잉투기>의 저 대사가 떠올랐던 이유는, 이번 주에 <잉투기>를 연출한 엄태화 감독의 신작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봤기 때문입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적 배경을 갖고 있는 영화인데요. 영화는 엄청난 지각 변동이 일어나 모든 건물과 시스템이 붕괴된 서울을 배경으로 진행됩니다. 그중 우연히 무너지지 않은 단 한 채의 황궁 아파트가 존재한다는 것이 영화의 주요한 설정인 것이구요. 바로 그 아파트를 중심으로 살아남은 인간들의 생존 싸움이 펼쳐지게 됩니다.
영화를 보며 “이민 안 가면 안 돼?”라는 말이 생각난 건, 저 대사가 배우이자 엄태화 감독의 친동생이기도 한 엄태구 배우의 입에서 나온 대사이기 때문입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엔 엄태구 배우가 까메오로 잠깐 등장하는데요.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만약 태식이 얌전히 엄마의 말을 따라 코스타리카로 이민을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하는 상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랬다면 지금 까메오로 등장한 엄태구 캐릭터처럼 험한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요. 물론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설정에 따르면 한국뿐만이 아닌 전 세계가 전부 뒤집어진 것처럼 느껴지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지구 정반대 편에 위치한 나라인 만큼, 어쩌면 한국보다는 나은 상황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영화를 보고 나서, 이렇게 이런저런 외적인 상상을 해보는 것이 정말 얼마 만인 것일까요. 특히 한국 영화를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간만에 기분 좋게 추천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일단 영화가 웹툰 원작으로부터 가져온 독특한 세계관을 잘 구현해냈다고 생각하는데요. 세상의 모든 건물이 붕괴됐다는 설정이 어찌 보면 정말 말이 안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인데, 이 영화를 보고 느낀 건 엄태화 감독의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말이 되는 것처럼 믿게 하는 솜씨가 매우 대단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엔 배우들의 힘도 컸을 것입니다. 그중 단연 압도적인 배우는 역시 이병헌입니다. 저는 이병헌 배우가 나온 영화만큼은 그 어떤 상황이 있어도, 세상 모든 영화관이 무너졌다고 하더라도 챙겨 볼 의지가 있을 정도로 이 배우를 신뢰하는데요. 이번 영화에서도 관객들로 하여금, 어떻게 보면 약간 작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한 인물에게 완전히 빠져들도록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이병헌이 연기한 인물김영탁은 영화 속에서도 실제로 군중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캐릭터이기도 하여, 이병헌 배우의 퍼포먼스가 더욱 극대화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좋았던 이유는 이 영화가 한국을 제대로 담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사실 이해가 잘 가지 않으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이 영화에 묘사된 ‘한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과는 정말 다른 상태이기에 그렇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영화 속 한국은, 모든 건물이 다 무너져버린 상태입니다. 서울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고층 빌딩과 수많은 아파트들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한국. 돈이면 다 된다는 한국에서 돈이란 게 아무 의미 없어진 한국. 하지만 아주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다 붕괴되자, 여기에 진짜 대한민국의 속살이 그 형태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와 가장 가까운 영화는 <부산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산행>이 달리는 기차를 통해 작은 한국을 묘사했다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걸 ‘아파트’ 한 채로 합니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 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그리고 이 영화의 메인 OST이자 한국 사람들의 최고 애창곡인 가수 윤수일의 ‘아파트’ 속 구슬픈 곡조는,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비극의 한국’과 소름 끼치도록 절묘하게 어우러집니다.
언제나 나를 기다릴 줄 알았던 나의 아파트가 사라져버렸을 때. 언제나 나를 지켜줄 거라 믿었던 국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그때 느껴지는 ‘비참함’이 공동체 내에서 마치 좀비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갈 때. 그럴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여러분의 그 상상을, 기분 나쁠 정도로 충실히 구현해낸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상상 그 이상의 무언가가 나오는 영화가 아니라서 더욱 ‘한국’인 한국 영화. 그런 점들로 인해 상업 영화의 제1 목표인 흥행에는 실패할지도 모르겠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정말 잘 쌓은 아파트 한 채라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