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일요일에는 넷플연가에서 진행하고 있는 영화 모임 [칸 영화제가 사랑한 영화들 - 황금종려상 수상작들 비교해보기]의 마지막 시간을 진행하였습니다. 제가 마련한 이날의 주제는 ‘사랑이 시급한 이들을 위하여’였고, 다르덴 형제 감독의 <로제타>와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의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두 영화를 함께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두 영화를 선정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적었습니다.
“모든 영화는 결국 사랑에 관한 영화입니다. 감독이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주인공을 사랑하지 않으면 영화가 만들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화에선 감독이 주인공을 더 사랑하기 위해, 계속해서 더 큰 시련을 내리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위기에 처한 영화 속 인물들을 보며, 우리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영화들을 떠올려봅니다.”
제가 모든 영화는 결국 사랑 영화라고 생각하게 된 건 꽤 오래된 일입니다. 꼭 로맨스 같은 ‘사랑 영화’가 아니더라도, 위에 적은 것처럼 감독이 주인공을 사랑하지 않으면 영화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기에, 영화엔 어쩔 수 없이 사랑이 배어 나오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감독이 주인공을 악마로 상정하고 고발하는 영화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 인물에 관심을 갖고, 그 인물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그 마음을 상상해보는 행위는 넓은 의미로서의 사랑에 포함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날 저는 한 참석자로부터 예상치 못한 질문 하나를 받았습니다. 소개 글에 쓴 어떤 표현에 관한 질문이었는데요. 그건 바로 “감독이 주인공을 더 사랑하기 위해, 계속해서 더 큰 시련을 내리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라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물론 겉으로만 봤을 땐 이상한 말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사랑하는데, 왜 예뻐해 주기도 모자란 시간에 시련을 내린다는 것일까.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비록 너무 오래전에 쓴 소개 글이라 왜 그렇게 썼는지 떠올리는데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요.
우리에게 가끔 힘든 일이 닥쳐올 때 이런 얘기를 하잖아요. “신은 인간에게 딱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내린다.” 저는 물론 신의 존재를 믿진 않지만 이 말만큼은 믿어요. 죽지 않을 정도의 시련은 우리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것이라는 걸요. 당연히 애초에 시련이 없으면 좋겠지만, 이미 일어난 시련은 어쩔 수 없는 것이잖아요. 그럴 땐 이렇게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은 거예요. 우리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신이 있다고요. 그런 상상을 하며 버티면 좀 더 이겨내기 수월할 거니까요. 마찬가지로 영화감독도 주인공을 좀 더 주인공답게 하기 위해. 엄청난 시련을 훌륭하게 극복한 멋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하여 주인공을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로 하여금 주인공을 완전히 사랑하게 만들어버리기 위해 시련을 내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서 신인 것이니까요.
또 다른 세계에선 어떤 신들이 어떤 방법으로 자신이 창조한 세계와 주인공을 사랑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저는 7월 8일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영화 모임에서 이 방법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눠볼 예정입니다.
<가오갤3>의 메인 주제가라고 할 수 있는 레드본의 노래 ‘Come And Get Your Love’의 표현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이 자리에 오셔서 사랑(의 방법)을 챙겨 가시라구요. 홍보 글을 쓰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홍보로 마무리하게 되었네요. 읽어주신 김에 모임 상세 페이지도 한 번 구경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참고로 새 모임에서 함께 이야기할 영화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스터>(폴 토마스 앤더슨, 2012) <멜랑콜리아>(라스 폰 트리에, 2011)
<그랜 토리노>(클린트 이스트우드, 2009) <폭스캐처>(베넷 밀러, 2014)
<쓰리 빌보드>(마틴 맥도나, 2017) <재키>(파블로 라라인, 2016)
<산책하는 침략자>(구로사와 기요시, 2017) <5일의 마중>(장이머우,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