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각은 감독이 창작한 마르셀이라는 캐릭터의 모습에도, 감독 자신의 무언가가 반영되어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게 합니다. 어떤 큰 문제 때문에 작은 문제들을 등한시하고 있는 나. 어떤 문제가 내 인생에서 더 큰 문제인지, 무엇에 더 집중해야 하는 건지 갈피를 잡고 있지 못하는 나.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이 문제를 미뤄둘 수도 없는 것입니다. 미루고 또 미룸으로써 산더미처럼 쌓여버린 설거짓거리들은 절대 저절로 씻기지 않는 것일 테니까요.
그것을 모르지 않지만 우리는 오늘도 일상을 살아갑니다. 마르셀의 영화엔 극적인 일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영화가 아니기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 문제는 평생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 저는 부엌 싱크대 앞에 서서 설거지를 하며 창밖을 봅니다. 아니 사실은 가끔 설거지를 하며 창밖을 볼 때,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속에 쌓여 있는 설거짓거리들을 살짝 들춰보곤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곳이, 제가 저의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입니다.
제 친구 마르셀은 세탁방에 있는 창가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홀로 서서 바람을 맞기도 한다고 하는데요. 특히 그때 들리는 특별한 소리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바람이 자신의 껍데기를 통과하면서 발생시키는, 아름다운 소리를 말입니다.
그 소리는 분명 그곳에 마르셀이 서 있었기에 날 수 있는 소리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세상의 일부임을 몸서리 쳐지도록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소리. 잠깐 동안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잊게 해주는 소리. 이유 모를 마음의 평안을 선사해 주는 소리. 그건 나와 세상이 부딪혀서 생기는 파열음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통과함에 따라 자연스레 발생하는 아름다운 소리인 것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