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그림을 바꿨습니다. 한 번 바꿔야지 생각만 하다가 귀찮아서 못 바꾸고 있었는데. 실은 매 호마다 그림을 바꾸겠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열한 번째 만에 드디어 바꾸게 되었네요. 그런데 이렇게 된 김에 앞으로 열 번째마다 한 번씩 그림을 바꾸는 게 뭔가 느낌이 있는 것 같아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챕터’가 생기는 느낌이랄까요. 인스타그램에 한 번에 올릴 수 있는 사진도 딱 10장이라, 10주마다 한 번씩 그동안 썼던 메일을 정리해볼 수도 있는 것이구요.
[NO.011]
다음 챕터 화이팅
2022년 5월 14일
한 챕터를 정리하는 포스팅에 무엇을 적을까 고민하다가, 뉴스레터에서 머리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영화에서 발췌한 장면인지, 왜 이 장면을 뉴스레터의 대문으로 선정했는지에 대해 얘기해보는 것이, 뉴스레터를 읽는 또 하나의 재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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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2020년 공개한 약 28분짜리 단편 영화 <휴먼 보이스>에서 따온 것입니다.(영화는 티빙에서 감상 가능하십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감독인데요. 특히 2019년 개봉한 영화 <페인 앤 글로리>, 2002년 개봉한 <그녀에게>를 매우 사랑합니다.
사진 속 손의 주인은 틸다 스윈튼입니다. 틸다 스윈튼도 다들 잘 아시죠? 여러 영화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특히 카리스마 있거나 똑부러진 역할을 많이 맡았던 배우인데, 이 영화에선 약간의 불안 장애를 앓고 있는 듯한 모습의 연기를 선보입니다. 30분의 러닝타임 중 거의 대부분이 틸다의 독백으로 꾸며진 영화이구요. 또 그중 대부분은 이제 곧 헤어질 애인과의 전화 통화입니다. 이때 애인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오직 틸다 한 사람의 질문과 대답, 액션과 리액션으로만 영화가 흘러갑니다. 그런데 그 호흡과 완급 조절이 너무 완벽해서 들리지 않는 애인의 말투나 뉘앙스가 느껴질 정도인데요. 이 ‘원-휴먼-보이스-쇼’를 보는 것만으로 <휴먼 보이스>는 30분이 전혀 아깝지 않은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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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연극 같은 쇼가 뭔가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그냥 단순히 이 영화에서 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별 과정에서 정말 찌질하게 할 말 못할 말 다 하는 한 사람의 모습이 저를 보는 것 같았거든요. 아니 사실 저는 이제는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할 말이 정말 많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말을 쏟아내기보다는 그냥 꾹 참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나도 너 이거 마음에 안 들었고, 나도 그때 화났는데 참았고, 너 시간 없어서 주말에 나 못 만난다고 했으면서 갑자기 다른 친구 만난 거, 같이 있을 때 인스타한 거, 내가 추천한 영화 꼭 보겠다고 했으면서 안 본 거, 내 인스타 최근에 올린 거 잘 안 읽은 거, 말하자면 계속 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다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저를 보았다’고 썼지만, 진짜 저를 본 것이라기보다는 제가 속으로 ‘되고 싶었던 저’를 보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네요. 정확하든 안 정확하든, 그래서 이 영화에 끌렸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요.
그리고 ‘헤어지는 과정’의 디테일이 재밌는 영화입니다. 연인으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자 3일 동안 집에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연인을 기다리던 틸다가, 간만에 옷을 빼입고 외출을 합니다. 이 외출의 유일한 목적은 도끼를 사기 위함인데, 틸다가 이 도끼를 산 이유는 애인의 옷을 도끼로 내려찍기 위함입니다. 말 그대로 정상이 아닌 상태인 틸다인데요. 이때 재밌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속해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던 와중 애인에게 전화가 걸려오자, 이때 틸다가 별안간 함박웃음을 짓고 정상인 척, 괜찮은 척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연락을 기다리며 쩔쩔 매다가 마침내 좋아하는 사람의 연락을 받고 아무렇지 않은 척, 별로 안 기쁜 척을 하던 제 자신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를 지었던 장면이었습니다.
또 재밌었고 공감 갔던 대사가 하나 있는데요. 틸다가 애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난 너한테 내 유머를 발휘해본 적이 없어. 난 누구한테 빠지게 되면 유머 감각을 잃게 되거든. 이건 진짜 불편한 일이야. 가장 웃기고 싶은 사람을 웃길 수 없다는 게.” 이거 또 저 혼자만 공감돼서 킥킥대고 있는 건 아닌지 살짝 걱정이 되는데요. 혹시 재밌으셨다면 재밌었다고 좀 알려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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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 장면을 머리 그림으로 선정한 이유는요. 별건 아니고 그냥 저 테이블에 올려놓은 영화와 책의 목록들이 한 사람의 취향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작년 개봉한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데요. 이 영화도 제가 좀 좋아하는 영화인데, 아무튼 그 영화에서 남녀가 서로 반하게 되는 이유가 ‘문화적 취향이 너무도 비슷해서’입니다. 얼마나 비슷하냐면 여자가 남자의 집에 첫 방문해서 처음 하는 말이 “이 책장 내 책장인줄”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책장에 진열되어있는 목록이 곧 한 사람의 취향인 것처럼, 틸다의 테이블 위에 놓인 리스트가 곧 틸다의 취향인 셈이니까요. 원데이원무비 또한 제가 한 주간 본 영화 중 제가 좋게 본, ‘철홍 취향 영화’들만 골라서 진열하는 것이기에, 둘이 꽤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 장면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별로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나름 절묘한 선택이었다고 감히 자평해봅니다.
이렇게 이번 주도 제 취향에 대해서 적다보니, 갑자기 궁금해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틸다가 정리하고 있는 저 테이블을 정말로 틸다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틸다가 아닌 전 애인의 취향 테이블일 수도 있는 것이고, 그것도 아니면 애인과 틸다의 취향이 뒤섞여버린 제3의 테이블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둘의 관계가 잘 정리되어 깔끔하게 남이 된다 하더라도, 과연 이 테이블 위의 섞여버린 취향은 잘 정리가 될 수 있을까요. 틸다의 취향 테이블의 다음 챕터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요.
영화의 마지막. 이제 틸다에게 남은 것은 애인이 기르던 반려견 대쉬 뿐입니다. 틸다는 애인에게 이 개는 어떻게 하냐며 마지막 저항을 해봅니다. 이 개는 나를 원하지 않아. 이 개가 원하는 것은 당신뿐이야. 그러나 완강한 애인은 그 개를 원하지 않습니다. 아니 틸다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통화가 끝이 납니다. 집을 나서며 틸다는 대쉬에게 말합니다.
대쉬야. 이제 네 주인은 나야. I am your master now.
난, 너의, 주인이야, 이제.
난, 주인이야.
이 말과 함께 화면이 하얘지며 28분의 짧은 영화가 끝이 납니다. 짧은 영화지만 긴 여운이 남습니다. 영화는 다음 챕터 없이 끝나지만, 어디선가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보내고 있을 주인공 틸다를 상상해봅니다. 틸다 화이팅.
- ONE DAY ONE MOVIE by 김철홍 -
[원데이 원무비 지난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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